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내 아껴 온 문장을 붙들며 살아낸 시간들
무언가를 향한 마음은 누군가의 인생을 얼마나 바꿀 수 있나. 사랑에 빠지는 건 지나치게 쉽다. 정말 어려운 건 그 애틋함을 지속하는 일이다. 계속해 온 시간은 분명 중요하다.
《난생처음 번역》은 《카프네》, 《중년에 지친 밤에는》, 《오늘의 인생》 등을 옮긴 이소담 작가가 번역 일을 꿈꾸게 된 순간부터 17년 차 번역가가 된 현재까지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자 <난생처음>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이다.
작가는 베테랑 번역가인 동시에 아끼고 애정을 쏟는 게 많은 ‘덕후’다. 그의 ‘덕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이돌부터 록 밴드, 뜨개질, 영화, 애니메이션 성우까지 긴 목록을 훑어야 한다. 하지만 직접 짠 목도리처럼 기다랗게 이어지는 덕질 항목 중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좋아하는 책과 그 책을 쓴 작가다.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꾸준하고 끈덕진 사랑의 서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낸 시간은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설켜 하나의 편물을 이룬다. 작업실에 책이 점점 쌓여가는 것이 그저 행복하기만 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다시 작가의 문장을 빌려 전해본다. “이렇게 좋으니 어쩔 수 없지. 앞으로도 번역하고 글 쓰는 인간으로 사는 수밖에!”
이소담
죽을 때까지 읽고 쓰고 번역하며 살고 싶은 일한 출판 번역가.
일할 때 가장 행복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제대로 사는 것 같은 일 중독자. 오늘은 이 단어, 내일은 이 문장에 울고 웃고 정신이 혼미하지만, 언젠가 믿고 읽는 번역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번역을 비롯해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하면서 살고 싶다. 책, 아이돌, 영화, 뜨개 등 그때그때 꽂힌 것을 내 속도에 맞춰 여유롭게 즐기는 중이다.
《양과 강철의 숲》, 《카프네》, 《프라이즈》,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중년에 지친 밤에는》, 《오늘의 인생》 시리즈, 《십 년 가게》 시리즈 등을 비롯해 다양한 책을 번역했다. 지은 책으로는 파란만장 덕질 인생을 말하는 에세이 《그깟 ‘덕질’이 우리를 살게 할 거야》와 글쓰기 모임에서 힘을 모아 만든 합동지 《소설, 첫 번째 계절》이 있다.
들어가며_번역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1. 번역이라는 가시밭길로 뚜벅뚜벅
루틴이 아닌 루틴
번역가라는 존재를 인식하다
넝쿨째 굴러들어 온 일본어
게으른 소심자의 빙글빙글 방황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당탕탕 일본어 공부
망가진 하드디스크 속 번역 아카데미
대학 생활, 무의미하지는 않았네
워킹홀리데이와 대지진과 연애와 번역
2. 세상에 이런 번역이
샘플 번역은 어려워
처음으로 소설을 번역하다
번역 공부하는 학생, 그런데 번역서가 있는
《양과 강철의 숲》을 거닐다
아이는 없지만 아동서를 사랑해
청소년을 위한 책에 위로받기
소녀 동지가 심장을 꿰뚫다
3. 번역과 함께 살고 또 살고
월화수목금금금? 월화수목금금일
한 달 살기와 우울함
내 집 장만 NO, 내 작업실 장만 YES
작업실 얘기 조금만 더, 그런데 취미 얘기에 치우친
집에 토끼 같은 마감이 있어서
소심한 자도 북토크를 하더라고요
문학상, 수상작 없음
4. 그래도 번역이 좋아서
오래오래 해 먹으려면 건강해야
방송대에 다니고 글도 쓰고 이것저것 다 해요
초심, 있었는데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AI 이야기는 이미 흔해졌겠지만
내 책이 번역된다면
마무리하며_여전히 여기에서, 앞으로도 번역을 외치다
덕질용으로 시작한 공부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번역의 비읍도 모르던 내가 번역가라니
사랑에 빠지는 일은 종종 교통사고에 비유된다. 그만큼 예측할 수 없으며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의 일본어 공부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꽂힌 일본 록 밴드의 가사를 알아듣기 위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우면서 처음으로 일본어를 눈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부만 아니면 다 재미있던 고3 수험생의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일본어를 다시 만난 건 대학교 4학년 시기, 선배의 권유로 일본어 스터디를 시작하면서였다. 꿈은 요원하고 스펙은 없었으며 취업 준비도 취업도 싫었던 그는 스터디를 핑계로 애니메이션을 실컷 봤고 그러다가 일본 성우에게 푹 빠졌다. 그때부터 공부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전혀 모르던 말을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일본어와 놀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어로 먹고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살다 보면 운전대를 어디로 틀게 될지 알 수 없는 법. 이리저리 방황하다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일본인이 건 문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회화 학원 선생님을 제외하면 살면서 일본인과 나눈 첫 번째 대화였다. 작가는 그때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도움을 준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계기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게 번역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마음먹긴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나요
대단한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꾸준히
그렇다면 도대체 번역가는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 걸까. 절절한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거듭하다가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될 수 있는 실력부터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험 삼아 집에서 원서를 번역해 봤지만 결과물을 보고 바로 좌절했다. 하지만 그는 까탈스럽게 좋아할 대상을 고르면서도 일단 이거다 싶으면 아낌없이 퍼붓는 사람이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역 일이야말로 그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찾아낸, 그에게 꼭 맞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는 그가 이름 석 자 앞에 번역가라는 왕관을 달기 위해 고꾸라지고 넘어지며 고군분투한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제대로 출판 번역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내고 최대한 일본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일터를 찾으며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꾸준히 운동하면 기초 체력이 붙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덕질용 수준이던 일본어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다음 일들이 술술 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한 소설 번역은 그야말로 ‘허름한 넝마’ 같아서 편집자의 빨간 펜을 지침 삼아 각오를 다져야 했다. 지원하는 족족 샘플 번역에서 떨어져 마음을 다치다가 다시 생각을 긍정적으로 고쳐먹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본어를 ‘야매’로 익혔다는 생각에 도쿄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도 했다. 비록 그 시간이 번역가 경력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알바와 생존과 연애에 정신이 팔렸었다) 자기 힘으로 각종 문제를 해결한 경험은 바람 잘 날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근성을 선물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런 고단함과 힘겨움을 견딜 수 있게 한 원천이 좋아하는 마음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책이든 번역을 맡으면 최선을 다해 흠모하게 되고, 취향을 저격하는 책을 만나면 누가 어디 가둬놓고 책을 못 읽게 한 것도 아닌데 허겁지겁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몰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책을 번역하게 되면 대책 없이 심장이 튀어 오르고 내가 아끼고 번역한 책이 서점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길거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비명을 질렀다. 이러니, 별수 있나. 계속 번역하며 살아야지.
평일이든 주말이든 별로 다를 게 없는 일상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울릴 때마다 일이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된 후에는 어떨까. 작가는 그가 사랑하는 마스다 미리의 문장들처럼 어느덧 17년 차가 된 번역가의 평범한 일상을 조곤조곤 생생하게 이야기해 준다.
약속을 잡을 때는 출퇴근 시간을 피하고, 메일은 두 시간에 한 번씩 확인한다. 유난히 바쁜 시기가 되면 외출은커녕 책상 주변을 벗어나기도 힘들다. 한때는 월화수목금금금, 월화수목금금금이 계속 이어지는 생활을 한 적도 있다. 아침에 눈뜨면 책상에 앉고, 잠시 밥 먹고 나서 책상에 앉고, 가끔 힘들면 침대에 누워서 일하다가 또 책상에 앉고, 그러다 보면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정신없이 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직장인처럼 주말이 있지는 않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한 주를 보내면 그다음 주는 월화수목금금일로 사는 식이다.
사실 이렇게 바쁘면 마음은 오히려 더 편하다. 일 중독자여서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새로 시작할 번역 일이 없으면 금세 불안해진다. 그러다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어휴, 세상에 부처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열심히 살게요.’ 하며 의자에 앉은 채 발을 동동 구른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역시 녹록지 않다. 그걸 잘 알기에 여전히 일이 들어오면 제일 기쁘고,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작품을 맡게 되면 전생에 복을 지은 덕분이라고 행복해한다.
그래도 책이 좋고 번역이 좋으니까
좋아하는 마음은 언제나 옳다
너무 좋으면 주변에 자꾸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무언가를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 중에는 열렬한 마음으로 대상을 예찬하는 기쁨이 있다. 나의 벅찬 마음을 가장 적절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이 있다. 《난생처음 번역》은 그런 행복함이 곳곳에 가득한 책이다. 아끼는 것이 많은 작가의 넉넉한 다정함이 사랑스럽고 그런 이유로 낯을 가리는 성격에도 부단히 바쁘고 소란스러운 그의 일상이 정답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좋으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이는 없지만 나쁜 사람은 벌받고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는 아동서에 위로받고, 청소년 소설을 번역하면서 나의 못나고 미운 모습을 되돌아본다. 내가 응원하는 책이 상을 받지 못하면 아쉬워하고, 아마도 평생 백억 부자가 될 가능성은 없을 거라며 푸념하다가도 이 나라 저 나라 할 거 없이 출판계의 안녕을 걱정하며 응원한다. 게다가 일을 하면 할수록 책이 점점 불어나 무한 증식하니 책이 좋은 작가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이렇게 책 속에 담긴 깊은 애정은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옮겨간다. 편집자들이 그의 메일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번역가라는 직업에 흥미를 느껴 본 적이 있을 듯하다. 책에 파묻혀 아름다운 문장을 음미하고 적합한 단어를 고르며 문체를 완성하는 멋들어진 모습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런 상상 혹은 환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일이 들어오면 행복하고 일감이 몇 권쯤 쌓여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지만, 일이 없으면 불행하고 다음 일감이 없으면 불안해서 배가 고파도 뭘 먹을 정신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은 인간의 가능성보다 AI의 효율성이 더 각광받는 시대다. 여러모로 번역가라는 직업이 미래도 현재도 밝지만은 않다.
하지만 작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중요한 것은 그 기간을 다름 아닌 번역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 번역가로 살고 싶다고 한다. 그 목표를 위해 오늘도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달래며 스트레칭과 폼롤러, 108배를 한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봤거나 지금도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결국 그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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